여행일: 2011. 10. 22
위 치: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마곡사 소개]
태화산 기슭의 맑은 계곡을 끼고 위치한 마곡사는 조계종의 대전·충남지역 70여 사찰을 관장하는 대본산(조계종 제6교구 본사)이며,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봄(春) 경치가 뛰어나다. 백제 의자왕 3년(서기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 명종 2년(서기 1172년)에 보조국사가 중건하였다. 절의 이름은 신라보철화상이 법문을 열 때 모인 대중이 삼밭(麻田)의 삼대(麻)같이 많다고 하여 마곡사(麻谷寺)라 이름 지은 것이라 한다. 가람의 배치는 태극도형으로 사찰을 감싸고 흐르는 태화천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및 대웅보전 등이 부처님의 공간(極樂世界)을 상징하며, 하천 남쪽으로는 영산전, 매화당 및 수선사 등을 배치하여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배치하였고, 이를 극락교로 연결하여 스님들의 수행 목적을 일깨우고 있다. 주위에 영은암, 대원암, 은적암, 백련암, 청련암, 부용암, 북가섭암 등의 부속암자가 산재해 있다.(마곡사 제공 안내문 인용)
일주문
태화천 주변의 단풍
주차장에서 마곡사까지 약 700미터를 걸어가게 되어 있는데, 길 우측에 태화천이 흐르고 있고 좌측에는 산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단풍이 너무 멋지게 들어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길 좌측의 산 언덕에도 단풍이 잘 들었습니다.
영은암 가는 길
마곡사 입구 근처에서 내려다 본 해탈문과 매화당
매화당
명부전
매화당(좌)과 명부전(우)
영산전(보물 제800호)
영산전은 마곡사에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51년(효종 2년)에 각순대사에 의하여 다시 세워졌다고 합니다. 내부에 7분의 여래불상과 1,000분의 작은 불상들이 모셔져 있어 일명 천불전(千佛殿)이라고 한답니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간결한 맞배지붕이 건물을 채색한 단청과 어울려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을 주는 훌륭한 전통목조 건물이라고 합니다. 현액(縣額)은 조선 세조가 이곳에 왔을 때 쓴 것으로 전해져 온다고 합니다.
극락교
산신각 올라가는 계단
산신각 올라가는 길에서 내려다 본 태화천과 단풍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웅보전은 아래에 있는 대광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本殿)입니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1592년) 때 불타 없어졌고, 현재의 건물은 1651년(효종 2년)에 각순대사와 공주목사 이주연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외관상으로는 2층 건물 형태인 중층(中層)이지만 내부는 하나의 공간입니다. 현존하는 전통 목조건축물 가운데 많지 않은 중층 건물로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입니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1592년) 때 불타 없어졌는데, 1813년(순조 13년)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건물 안 바닥에는 참나무로 만든 돗자리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으며, 부처님이 서쪽에서 동쪽을 보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건축양식은 외관이 장대하면서도 화려한 특징을 갖는 다포식(多包式)이며, 건물의 앞쪽에는 다양한 무늬의 꽃살 무늬 문을 달았습니다. 건물 내부의 화려한 공간구성과 함께 조선후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전통 목조건물이라고 합니다.
대웅보전(상)과 대광보전(하)
마곡사 5층석탑(보물 제799호)
마곡사 5층 석탑은 고려 말기에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탑이라고 합니다. 높은 이중 기단 위에 높게 서 있는데 지붕돌 폭의 변화가 거의 없어 안정감이 없다고 합니다. 이층 못쳇돌에는 사방을 지키는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져 있고, 탑의 끝부분에 라마탑에서 볼 수 있는 풍마동(風磨銅) 장식을 두었다고 합니다. 라마교는 티벳에서 발생하여 원나라 때 크게 융성한 불교의 한 종파입니다. 대광보전이 불탔을 때 크게 훼손되었고 1974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워 졌다고 합니다. 경천사탑, 원각사탑과 함께 원나라 탑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백범 김구 선생이 수행을 하셨던 곳이라고 합니다.
응진전
응진전은 부처님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을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 16나한은 중생에게 복을 주며, 중생을 바른 법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성자(聖子)를 말한다고 합니다. 철종 3년(1852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은신처였던 백련암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을 걷고 있으려니 마음이 평온해 지고 맑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백련암 가는 길 옆 골자기에 작은 폭포가 있는데, 한 그루의 단풍나무와 어울려 멋진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백련암
범범 김구 선생 은거지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한 이듬해 2월에 안악군(安岳郡) 치하포에서 우연히 편의(便衣)를 입은 일본군 중위를 만나게 되었답니다. 백범은 그 일본군 중위를 보자마자 격분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이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인 다음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는 포고문을 길거리 장벽(墻壁) 위에 대서특필하고 자기 성명과 주소까지 명백히 기입해 놓은 뒤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후 5월 11일 집에서 체포되어 해주옥에 구금되었으며 7월 초 인천감리영으로 이감되었다고 합니다. 1897년 7월에 사형이 확정되었고, 다음 달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1898년 3월 9일에 탈옥하여 전국을 방랑하다가 늦가을에 공주 마곡사(公州 麻谷寺)에 들어가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김구 선생이 이 곳에서 머무셨다고 하는군요.
등산로에서 바라본 백련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