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 2018. 1. 14.

위   치;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지산 김복한 선생]

안동인(安東人) 김복한의 자는 원오(元五) 요, 호는 지산(志山)이다. 문충공 상용(文忠公 尙容)의 10세손으로 철종(哲宗)1년(1860) 7월 24일 홍주읍 조휘곡(朝輝谷, 지금의 소향리 향산동)에서 출생하였다. 6세 되는 정월에 부친이 죽고 7세 되는 11월에는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에는 선생을 돌보던 조부마저 타계한 뒤 종조부 김민근이 거둬 학문을 가르치며 키웠다. 33세에 별시문과 (別試 文科)에 합격하여 교리(校理)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는 사서(司書), 통정(通政), 대사성(大司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승지 (承旨)에 올랐으나 왜적이 내정에 손을 뻗치자 갑오(甲午)년 4월에 벼슬을 버리고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을미(乙未)년 8월 역신(逆臣)과 왜적이 공모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이설, 안병찬(安柄璨), 이근주(李根周) 등과 의논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당시 홍주목사였던 이승우(李勝宇)에게 체포되어 홍주옥(洪州獄)에 투옥되었다. 다음 해 정월 경성 감옥으로 이송되어 고등재판소에서 10년의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병신(丙申)년 3월에 성균관장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고, 정유년(丁酉年) 3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무술(戊戌)년 국사가 절망 상태에 이르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문도(門徒)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을사(乙巳)년에 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역신들을 처단하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를 한 뒤 투옥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그해 12월 30일에 석방되었다. 병오(丙午)년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킨 데 관련한 혐의로 11월에 체포되어 공주 경무청에 다시 경성 경무청에 이송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정미(丁未)년 10월에 민심을 선동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공주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교자(轎子)가 청양 구수리 고개에 이르자 왜경이 대갈일성(大喝一聲)에 정교(停轎)를 명하고 곤봉으로 무수히 난타한 다음 발포하려는 순간 한인순경 정원조(鄭元朝 法東面人)의 급구(急救)로 명중을 면하였다. 이 때에 모진 고문으로 수족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여 식사와 대소변도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하였다. 기미(己未)년 전국 유림의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장서(長書)를 보내어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90여일 만에 석방되었는데 이때에 그가 옥중에서 읊은 옥중시가 있다. "人皆欲死死 我獨無其術 擬刃勿莫持 欲經足豈立 親屬樂不求 溺水尤無設 惟當餓而死 少學淸聖節" 신유(辛酉)년에는 문도의 수가 늘어나 인지제(仁智劑)라는 강당을 새로 세우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갑자(甲子)년 3월 29일 65세를 일기로 다난하였던 생애를 마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왜적이 망하거든 나의 영혼 앞에 왜가 망했다는 사실을 전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에 있고, 1973년 제자들과 홍성군수 조영호(趙塋鎬)의 성의로 군비를 투입하여 추양사(秋陽祠)라는 사우를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홍성군청 홈페이지 내용 인용)

 

 

 

 

추양사

 

 

 

 

 

 

 

 

 

 

 

 

 

 

 

 

 

 

 

 

 

 

 

 

 

김복한 선생 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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