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 2018. 3. 1.

위   치: 충남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남이흥 장군]

 

선조 9년 1576. 7. 27 (양력 9월 10일) 탄생, 자는 (士豪), 호는 성은(城隱),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글 읽기를 좋아하던 장군이 23세 때에 아버님 의천부원군 남유께서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시여 , 26세에 상(喪)을 벗고 아버지의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말달리기, 활쏘기 등의 무술을 연마하여 선조35년(서기1602년) 27세에 알성무과에 급제하였다. 장군은 선조 35년 1602년 27세 알성무과하여 현감, 부사, 목사를 거쳐 중군대장으로 있을 때인 1624년 적은 수의 군사로 대병(大兵)인 이괄의 반란군을 평정했다. 이에 조정은 장군을 진무 1등 공신 종1품에 영전시키고 의춘군에 봉하였다.

1627년 인조 5년 부원수겸 평안병사로 있을 때 후금(청국)의 3만6천 대군이 침공함에 정묘호란의 마지막 전장이었던 안주성 싸움에서 3천여 명의 군사로 혼신을 다하여 독전 분투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적을 화약고 있는 쪽으로 유인, 화약고에 점화하여 많은 적과 함께 자폭으로 최후를 마치었다.

그 날이 1627년 정묘 1월21일이고 연세 52세이니 역전의 원수로서 이렇듯 살신위국 함은 전사에 보기 드문 충절이라 하겠다. 어머님께서 아드님이신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들으시고는 우시며 말씀하시길 “30년 사이에 부자가 모두 나라를 위하여 죽었도다, 두 사람의 죽음은 영광된 것이라 무슨 한이 있으랴 마는 전몰 군사와 그 미망인과 자식들이 잿더미속에서 울게 됨이 한스럽다.”고 말씀하시었다.

인조 임금께서는 장군의 소식을 들으시고 진도(震掉:신하의 죽음을 슬퍼함)하시며 장례 때에는 눈물을 흘리시며 입고 계신 옷을 벗어 친히 장군의 관(棺)에 덮어 주시면서 애도하였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을 증직(贈職)하고, 의춘부원군(宜春府院君)에 봉(封)하였으며 충장(忠壯)의 시호와 아울러 특별한 충신에게만 내리는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내리어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고 특히 평안도 안주(平安道 安州)에 사당을 짓고 충민(忠愍)이라 사액(賜額)하였다.

당시 조선과 우호국인 명나라 조정에서도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군의 민족자존 애국충의지심을 높이 평가하여 그 절개를 기리며, 표창하는 특전(특전:붉은 비단천에 충신의 이름을 크게 써놓고 국민들이 제일 많이 내왕하는 곳에다 걸어놓고 귀감으로 보게 하는 것)을 했다 한다.

또한 안주의 백성들은 장군의 화상을 그려 놓고 그 밑에 이름을 써 놓고, 제사(察祝)를 올리고, 심한 가뭄, 역병, 역질이 있을 때마다 이 곳에서 열심히 제사와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 곳의 이름을 일러 북신사(北神祠)라 하였다.[출처: 남이흥 장군 홈페이지]

 

[남유 장군]

 

?∼1598(선조 31),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공근(公瑾). 할아버지는 참판 남세건(南世健)이고, 아버지는 참의 남응룡(南應龍)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부평 현감이 되었다. 1598년 정유재란 중 나주목사로 있으면서 노량해전에 출전하여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적을 섬멸하던 중 승전을 눈 앞에 두고 적의 탄환을 맞고 죽었다. 뒤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다. 숙종 때 정문(旌門)이 세워졌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이흥 장군 영정

 

 

 

오른쪽이 남이흥 장군의 묘이고, 왼쪽은 아버지 남유 장군의 묘입니다.

 

 

 

남이흥 장군 부부 합장묘

 

 

 

 

 

 

 

남유 장군 부부 합장묘

 

 

 

 

 

 

 

 

 

남이흥 장군의 부실(副室, 첩을 점잖게 이르는 말)인 연안 김씨의 묘입니다. 어떤 분이 올린 블러그 내용에 의하면, 연안 김씨는 아버지의 죄를 갚겠다고 장군을 따라와 부실이 되었는데 남이흥 장군이 자폭했다는 소식에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고 합니다.

 

 

 

 

 

남이흥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는 공사 중이어서 내부를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남유 장군과 남이흥 장군에게 내려진 충신 정려입니다.

 

 

 

 

 

남이흥 장군의 어머니께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으시고는 우시며 말씀하시길 “여러 해(30년) 전에 아버지(남유 장군)는 남해에서 죽고 올해에는 아들(남이흥 장군)이 서쪽 요새에서 죽었도다. 두 사람의 죽음은 영광된 것이라 무슨 한이 있으랴만 전몰 병사와 미망인과 그 자식들이 잿더미속에서 울게 됨이 한스럽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남이흥 장군의 신도비(좌)와 남유 장군의 유허비(우)

 

 

 

감사합니다

 

 

'충남 당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고항  (0) 2018.03.04
영랑사  (0) 2018.03.03
충청도 최초의 본당 '합덕성당'  (0) 2017.06.25
순교미술관  (0) 2017.04.02
당진 필경사  (0) 2017.02.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