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 2017. 10. 2.

위   치: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 시인이며 성리학자, 교육자, 화가이다. 본관은 한산, 자(字)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죽피옹(竹皮翁)·시촌거사(枾村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李塏)의 종고손이 된다.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조선 명종 때부터 광해군 때까지 벼슬을 한 조선시대 학자,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거친 당대의 세도가이자 문장가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서훈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당색으로는 동인으로, 동인 당의 주요 수뇌부이자 전략가이기도 했다.

1558년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장력을 인정받아 명종의 명을 받아서 경복궁 대액을 썼던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그 무렵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라질 때 북인의 영수로서 정권을 장악했다. 이산해는 정여립의 기축옥사 무렵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으며, 1590년에는 광국공신 3등으로 책록되어 아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기축옥사의 참혹함을 보고 서인에게 원한을 품고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 된다.

1591년 정철의 처벌을 놓고 동인이 내부의 여론이 나뉘었을 때는 정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으며,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에는 북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1590년과 1591년, 1592년, 1599년과 1602년 세 번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했다. 화가 이산보의 사촌 형이고, 토정비결의 저자인 문신 겸 역술인 이지함은 그의 숙부이며, 한음 이덕형의 장인이기도 하다.

 

 

 

신도비

 

 

 

이산해는 고려말 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7세손이며, 이산해의 고조부인 이우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와는 사촌관계(이우와 이개는 이색의 증손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산해의 숙부는 토정비결의 저자인 이지함이며, 한음 이덕형은 이산해의 사위라고 합니다.

 

 

 

 

 

 

 

 

 

삼신도(三神島)

현재 이산해의 무덤이 있는 마을 입구에는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흙으로 만든 3개의 작은 섬이 있으며, 그 위에 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삼신도(三神島)라고 하여 도가(道家)의 흔적으로 본다고 합니다.이산해의 글 가운데 선경(仙境)을 동경하는 글이 많아서 삼신도를 만들었다는 게 이산해 후손의 말이라고 합니다.

 

 

 

 

 

사당(좌), 묘(우)

 

 

 

 

 

 

 

 

 

 

 

이산해 선생 묘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치가이자 문장가 이산해(1539~1609)의 합장묘이다. 상단 봉분 앞에 혼유석 상석이 있으며, 상석 좌우측면에 귀석(龜石)과 좌측에 묘비석이 세워졌다. 하단 상석 전면에 향로석(香爐石)과 좌우에 망주석, 문인석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현재의 석물은 1609년 묘 조성 시 세웠으며, 묘비는 1856년 중수(重修)하였다. 본관은 한산이며, 자는 여수, 호는 아계, 죽피옹, 초성이라 불릴 만큼 초서에 능하였다. 광국, 평난공신, 아성부원군에 봉군(封君)되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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