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 2018. 4. 22.

위   치: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김한종 의사]

김한종(1883. 1. 14. ~ 1921. 8. 11.) 의사는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유가(儒家) 출신인 그는 1906년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진(洪州義陣)에 종군하였으며 1917년에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1915년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였다. 동 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 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 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 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 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 친일 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대한광복회의 충청도 책임자였던 김한종은 박상진(朴尙鎭)과 함께 친일 부호 처단을 주관하였다. 그는 동지 포섭에 힘을 쏟으면서 군자금을 수합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을 위해 장두환(張斗煥)·엄정섭(嚴正燮) 등과 함께 충청도 지방 부호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또한 1917년 11월 칠곡(漆谷)의 부호 아산군(牙山郡)의 장용숙(張容淑)을 처단할 때 참여하였으며 1918년 1월에는 그의 지휘 아래 당시 악질면장으로 지목되어 처단 대상이었던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 등이 처단하게 하였다. 그 후 동 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1918년초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출처: 국가보훈처)

 

 

 

 

 

 

 

 

 

 

 

 

 

 

 

 

 

 

 

 

 

 

 

부명헌(明軒)

 

 

 

 

 

"백 번 참는 집에서는 언제나 큰 화평이 있다."

 

 

 

"고상한 선비는 종신토록 못난 것 같이 행동하고"

 

 

 

"지혜 있는 자는 처세하는데 어리석은 것 같이 한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효도를 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광복사(光復祠)

 

 

 

 

 

 

 

김한종 의사 영정

 

 

 

기념관은 폐쇄되어 있어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유품 등을 통하여 김 의사를 좀 더 깊이 알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하여 많이 아쉬웠습니다.

 

 

 

 

 

김 의사가 부친과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을 통하여 그 분의 됨됨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상백시(上白是)」란 말은 윗분께 사뢰어 올린다는 뜻으로, 윗사람에게 드리던 편지글의 첫마디나 끝말을 이두식으로 쓴 말이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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