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 2012. 2. 25.

위   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광현당

 

광현당은 매헌 윤봉길 의사가 출생하여 네 살 때까지 사셨던 집입니다.

 

안채

 

광현당의 부속 건물들

 

부흥원

 

부흥원은 윤 의사가 운영하였던 야학당입니다.

 

저한당

 

저한당은 윤 의사께서 네 살 때(1911년) 부친(윤황)을 따라 광현당에서 이사하여 사시던 집이며, 이 곳이 사적지로 지정되던 1972년까지 윤 의사의 유족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저한당으로 가고 있어요. 저한당은 광현당으로부터 약 150m 떨어져 있어요.

 

저한당 전경

 

저한당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채

 

대문 오른쪽에 있는 방이 윤 의사께서 사용하던 사랑방인 것 같습니다. 

 

윤 의사가 사용하시던 방 안에 윤 의사의 영정이 있네요.

 

저한당 후원에 있는 윤봉길 의사 동상

 

충의사 사적지 내에 윤 의사의 부인의 묘소가 있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윤 의사의 가족들은 윤 의사께서 순국하신 이후부터 해방되는 날까지 왜경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탄압과 감시 속에 시달려야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많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이 곳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입니다. 이 기념관에는 보물 제568호로 지정된 윤봉길 의사의 유품 30종 58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윤 의사의 유품들 중 윤 의사께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고는 가슴 뭉클함이 느껴지곤 합니다. 편지들을 읽어보면 윤 의사의 가족에 대한 사랑, 애국심, 성품, 문장력, 지적 및 의식 수준 등이 어느 정도 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윤 의사께서 중국 상하이에서 있었던 전쟁의 비참함을 어머니에게 전한 편지

 

이 편지는 윤 의사께서 동생인 영석 씨에게 보낸 것 같습니다. 윤 의사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 머릿말에서 "사랑스러운"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였어요.

 

이 편지는 윤 의사께서 거사 후 일본에서 수감 중일 때 어머니께 보낸 편지인 것 같습니다. 이 편지에서도 "'사랑하시는' 어머니에게 올림"이라고 되어 있네요.

 

위 시는 윤 의사께서 어린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남긴 유시입니다.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하는 윤 의사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당부의 말이 너무 눈물겹고 애틋합니다. 윤 의사 자신이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있으면서도 자식들에게도 조국을 위한 투사가 되어 달라고 하고, 윤 의사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으니 장차 빈 무덤에 찾아와 술 한 잔 부어 달라고 하고 있으며, 그리고 아비가 없음을 슬퍼하지 말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맹가(孟軻, 맹자의 본명), 나폴레옹, 에디슨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맹가, 나폴레옹, 에디슨은 훌륭한 어머니를 통하여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윤 의사께서 유시에서 이 세 사람들의 경우를 본받으라고 언급하신 것 같습니다. 아래 내용은 위 유시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강보에 쌓인 두 병정에게, 모순과 담, 너의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라. 그리고 너의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로는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푸레옹(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되손(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의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윤 의사께서 자신이 사용하던 사랑방을 정리한 후 벼루와 붓을 꺼내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란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롱을 떠는 맏아들을 안고 부엌으로 가서 아내에게 물 한 잔을 달라고 하여 마신 다음 아버지에게는 매부될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23살의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당시 윤 의사는 집안에선 장남이었고, 또한 아내와 자식을 두고 있던 가장이었습니다. 사랑스런 가족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윤 의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집을 나서면서 홀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 의거 이틀 전(1932. 4. 27.) 백범 김구에게 남긴 윤 의사의 이력서

 

이력서에 유족으로는 부모님, 아내, 그리고 두 명의 자식이 있다는 내용과 함께 그 가족들의 이름과 출생 연월일을 기재하고 있네요. 재미있는 부분은 둘째 아들 담(淡)에 대하여 "담(淡), 나 객지 나온 뒤에 출생"이라고 기재하고 있어요. 둘째 아들 담은 윤 의사께서 중국에서 망명 중일 때에 출생한 것 같습니다.

 

윤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면서 자필로 작성한 선서문입니다. 선서문의 내용은 "나는 적성(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무참하게 마구 죽임)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이라고 되어 있군요.

 

 

순국 직후의 사진에서 윤 의사의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내 할 일을 다 하였으니 기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형틀에 양손이 묶이면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는 윤 의사의 모습에서 숙연함이 느껴집니다.

 

충의사의 홍살문과 충의문

 

충의사는 윤 의사를 추모하는 사당입니다.

 

이 편액의 글씨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것 같습니다.

 

충의사에 모셔져 있는 윤봉길 의사 영정

 

문득 저한당 후원의 태극기가 제 눈에 들어 오네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그것도 아주 힘차게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충남 예산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연군묘  (0) 2013.01.12
'추사고택'의 가을  (0) 2012.10.21
덕숭산 수덕사  (0) 2011.12.30
김정희 선생 고택(추사고택)  (0) 2011.12.30
이남규 선생 고택  (0) 2011.12.30

+ Recent posts